사순 제5주일 (3/29/20) 오디오 강론-이남웅 스테파노 신부님
찬미 예수님!!!
형제 자매 여러분, 잘 지내고 계십니까? 두렵고도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내며, 지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믿음 안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가 힘든 시간을 이 상황들을 굳건한 마음과 믿음 그리고 희망 안에서 지낼 수 있도록 기도 했으면 합니다.
라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 뵙게 됩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가족과는 예수님이 아주 가깝게 지내셨던 것 같습니다. 마르타나 마리아가 오빠 라자로가 병들어 죽어 가는 것이 안타깝고 슬퍼서 예수님께 그 소식을 전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가족과 예수님이 가깝게 관계를 맺고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들의 다른 곳에서는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집에 모시고 대접해 드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무엇이라도 대접하려고 분주했던 마르타가 조용히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만 듣는 마리아가 보기 싫어, 예수님께 투정 부리면서 마리아보고 일좀 하라고 해달라고 하는 장면 이었죠. 예수님도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라자로를 사랑 하셨는지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아프고 죽을 위험에 있다고 한다면, 누구든지 모든 것을 멈추거나 버리고 달려가 만나거나 그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하고 싶을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세상을 떠나 다시 보지 못할지 모르기 때문에 한번이라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마지막 사랑을 나누기 위해 달려 가는 것이죠. 그렇게 사랑했던 라자로가 죽음 앞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이틀을 계신 곳에서 더 머물다가 라자로가 있는 베타니아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라자로가 걸린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다. 그 병으로 인해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 하십니다. 라자로가 겪는 어려움과 힘든 시간들이 그저 인간이라면 겪어야 하는 고통으로만 남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외국에서 생활을 하고 있던 중,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일이고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고 사목 하고 있던 성당에도 말씀드려 양해를 구하고 한국으로 날아갔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그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가는 도중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고 마지막 임종도 못보겠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한국에 도착해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중환자 실에서 힘겹게 누어 계시던 할아버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신 채 누어 계셨죠. 할아버지께 손자 왔노라고 말씀드리니, 힘겹게 숨을 몰아 쉬시면서, 작게 실눈을 뜨시고 저를 보셨죠. 그리고 고개를 한번 작게 끄덕이셨습니다. 너무나 다행 이었어요. 오랫동안 찾아 뵙지도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죄송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마도 손자는 보고 눈을 감으시려고 그러셨던 것 같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한국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는 상황 이었지만, 단 며칠 동안만 이라도 더 자주 뵈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할아버지가 계신 중환자 실에 출퇴근하면서 병자 성사도 드리고 기도도 해 드리면서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리로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고 나서야,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정말 삶의 마지막을 손자가 거행하는 성사와 기도 속에서 돌아 가시고 싶으셨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저를 죽음 앞에서도 기다려 주신 할아버지께 감사했습니다. 할아버지를 다시 살리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시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병상에 계시며, 힘겹게 매 숨이 마지막 인 것처럼 몰아 쉬시며 손자를 기다리신 할아버지의 사랑이 정말 크게 다가 왔습니다. 슬픈 기억으로 남을 수 있지만, 할아버지께서 저를 기다려주신 사랑에 대한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된 순간 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랑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사랑으로 라자로에게 달려 가셨습니다. 그 죽음이 나약한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 고통스럽고 슬프고 무능한 것으로만 남지 않고,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아주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시려고 그렇게 이틀을 더 머무시고 라자로의 무덤을 찾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마지막 순간이며, 사람의 능력이 더이상 발휘되지 못하는 무의미한 순간인 죽음을 가장 의미 있고,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에서 마저 하느님 사랑의 빛이 비치도록 하신 것입니다.
라자로를 죽음에서 다시 생명으로 일으키신 예수님의 이 기적은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또 믿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곧, 그분은 세상에 오신 생명의 빛이고, 그 빛은 죽음의 어둠도 이기는 영광이라는 믿음 입니다. 가끔, 살면서 부당하고 슬픈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또한, 하느님은 왜 나를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으로 이끌어 가시는가 하는 의문과 때로는 그분을 향한 미움 마저 갖게 됩니다.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님께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원망 섞인 말을 내 놓았던 것처럼, 나에게 도움과 사랑을 주지 않는 하느님이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또 가끔은 내가 너무나 믿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에게 가장 큰 원수가 된 것처럼 다가 올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순간이 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나에게 온 고통들이라고 하기엔 그 시간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차라리 그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 뿐일 때가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생 고생만 하시면서 살아오신 저의 할아버지께서 좋은 세상 다 누려 보시지도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신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아 보셨을 때와 병상에서 마지막에 아주 편하게 마지막 숨을 내 쉬시며, 다 내려놓으시면서 돌아 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쩌면, 하느님 품이 할아버지께는 가장 좋고 행복한 장소 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할아버지께는 마지막까지 저를 포함해서 가족들을 다 보고 생을 마감하시는 것이 행복 이셨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개를 움직이는 작은 움직임으로 라도 저에게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이 할아버지께서 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랑이 아니셨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할아버지를 하느님께 안겨 드리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슬픔도 있지만, 그 보다 더 크게는 하느님 아버지께 그렇게 할아버지를 잘 데려가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죽음을 맞이한 것은 세상의 눈으로는 더이상 영광과 사랑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라자로의 죽음이든, 예수님의 십자가든 모두 고통스러운 밑바닥 삶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모든 것들을 다 영광스럽고 좋은 것으로 하시기 위해, 우리가 맞이하는 고통과 죽음 뒤에 부활의 희망을 가르쳐 주시고 또 그렇게 이끌어 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겪는 그 모든 고통들과 무너지는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도 함께 겪으신다는 것을 느끼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바로 우리만 눈물 흘리며, 힘겹게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닌 그분도 눈물과 고통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은 라자로와 마르타 그리고 마리아와 너무 친해서 찾아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 그들의 슬픔과 아픔 그리고 원망과 절망 또 죽음까지도 같이 하는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순 시기가 거의 다 지나 가고 있지만, 이번 5주간을 통해서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드러내도록 하신다는 희망을 더욱 굳건히 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서로 떨어져 지내야 하지만, 그런 만큼 우리의 마음과 삶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기도하며, 그분과 진심을 나누는 하루하루가 되시길 기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