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참행복”에 대한 말씀
– 두 번째 행복 –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그 두 번째 행복을 살펴 봅시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실제로 행복한 사람들은 이 슬픔을 겪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울지만, 마음으로 웁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이에 대해 주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여는 내적 고통(슬픔)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여는 내적 고통입니다. 성경에서 울음은 두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먼저, 누군가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 우는 것입니다. 또 다른 측면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한 고통으로 마음이 아플 때 느끼는, 자기의 죄에 대해 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나누거나, 상대방과 깊은 유대를 나눌 정도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관한 문제 입니다. 타인으로 인해 우리가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는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냉랭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의무나 직무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웃이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돌처럼 굳은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우는 법을 잊어 버린 사람들이기에, 일깨워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서 일깨워져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는 것은 힘들 길이지만, 모든 인간의 신성하고 대체할 수 없는 삶과 가치에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 역설적인 행복에는 죄에 대한 눈물 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선 다음의 것을 식별해야 합니다. 우선, 실수를 해서 화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만심입니다. 반면, 잘못한 일에 대해, 실천하지 못한 선행에 대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배신한 것에 대해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눈물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한 일에 대한 눈물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주님께 우리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식” 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눈물이 나면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시다. 베드로 사도를 새롭고도 훨씬 더 진정한 사랑으로 이끌어준 그의 눈물을 생각해 봅시다. 이는 정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눈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울었고, 그 마음은 새로워졌습니다. 가엾은 유다와는 달랐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실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죄를 아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죄를 알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비 안에 잘 드러납니다. 사랑과 연관된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혜롭고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시고 바로잡아 주시는 성령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심지어 가장 추악한 죄까지도 용서해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청하는데 지칩니다.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시려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죄 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 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신다”(시편 103,10)는 분이심을 우리가 항상 명심한다면, 우리는 자비 안에 살고 우리 안에 사랑이 나타날 것입니다.